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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심순택 / 沈舜澤 / Shim Soon-taek
작위 청녕공(靑寧公)
출생 1824년(순조 24)
사망 1906년(고종 9) 2월 25일 (향년 82세)
대표 이력 조선 영의정
대한제국 귀족 공작
대한제국 7⋅9⋅13⋅15 의정대신
한무도와 관계 조력자

1. 개요

조선, 대한제국의 문신이다.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주창한 최초의 인물이며,
1906년 양반 사대부 중 유일무이하게 대한제국 공작(청녕공, 靑寧公)에 봉작되었다.

2. 생애

1850년 문과에 급제, 1852년 한림초시에 합격하여 1853년 홍문관 교리, 1857년 안변군 군수, 1861년 부제학으로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62년(철종 13) 예방승지, 1874년(고종 11)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 도봉소 당상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이후 1884년 우의정, 그 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민씨 정권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으로 병조판서와 친군영 도제조를 겸하였다. 심순택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분쟁 사이에서 정치적 고충을 겪었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 발발을 계기로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강압적으로 내정개혁을 요구하자 사표를 제출했다.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처음 제안한 인물
“고종 34년 정유년(1897년) 9월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문무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한 결과 17일 계묘일(癸卯日)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어 고한 다음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 고종실록 -


1896년 아관파천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이 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공홍식 옥중살해사건이 계기가 되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벼슬을 그만둔 뒤 국정은 점차 일본의 주도권 하에 드는 망국에 들게 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원로대신들인 기사에 있던 대신들은 특진관 조병세를 위시하여 모두 울면서 조약반대를 하였다. 특히 조병세 등 수 명이 자결하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특히 심순택은 매국노를 규탄하고 원로대신들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906년 고종이 '나라의 큰 공로가 있는 원로로서, 심순택을 특별히 공작(公爵)에 봉하라' 는 조령(詔令)을 내려, 심순택을 청녕공(靑寧公)에 봉하였다. 공작에 봉작된 지 5일후에 사망하니,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일강제병탄 전에 받은 순수 공적에 따른 귀족 작위. 조선귀족은 매국의 개념으로 보상 받은 것이기에 대한제국 귀족과 반드시 구별해야한다.

3. 한무도와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