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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역사:독립협회_결성

독립협회

[ 獨立協會 ]

시대명 : 근대/개항기


서재필과 독립협회 회원들

1896년(고종 33, 건양 1) 7월에 조직된 사회·정치단체. 외국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지식층 30여 명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파 내정개혁을 표방하여 결성한 것으로,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이 적극 참여했으며, 발족당시에는 이완용·안경수 등 정부요인들도 여럿 참가했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 등 민중계몽 운동에 힘써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곧 정치운동으로 옮겨, 96년 11월에 모화관(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수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했으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 정신의 상정으로 삼는 한편, 계속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민족의 자주의식을 높이고 개화사상을 고취했다. 97년 2월에는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실현시키는 등 정부에 대해 강한 비판기능을 발휘하여 사회단체 중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98년 종로광장에서 최초의 민중대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개최, 국정의 자주노선을 요구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이의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했다. 고종도 처음 6조의 실행을 약속했으나, 이권에 눈이 어두운 정부 대신들의 방해로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협회에서는 정부를 맹렬히 탄핵하기 시작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정부수뇌들은 황제에게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거짓 고하여 이상재 이하 17명의 협회간부를 체포케 했다. 독립협회는 회원들을 총동원하여 석방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시켜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정부고관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켰고, 고종은 11월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는 한편, 양 협회 대표를 불러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을 약속하고 협회의 해산을 명했다. 이로써 협회는 해산됐으나, 그 후에도 만민공동회의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99년(광무 3) 초에 완전히 해산되었다.

관련역사/독립협회_결성.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3/10/10 02:54 저자 u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