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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역사:동학군_우금치_전투_패배

우금치전투

[ 牛金峙戰鬪 ]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 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언제: 1894년(고종 31)
어디서 : 공주 우금치
누가 : 동학농민군
무엇을 : 동학농민운동 가운데 가장 큰 전투
어떻게 :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삼아 공주를 협공하였으나 월등한 무기를 가진 조선, 일본 연합군에 대패
왜 :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친일정권에 항거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동학 남접의 접주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에 항거하기 위하여 공주와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하기로 정하고 북접과 연합전선을 이루었다. 전봉준은 먼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올라오다가 그해 10월 논산에서 손병희(孫秉熙)의 북접군과 합류하였고 일시에 공주를 공격하기로 정하였다. 한편 신정희(申正熙), 이두황(李斗璜), 허진(許璡) 등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정부군은 200여 명의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공주로 향하였다.

10월 23일 이인(利仁), 효포(孝浦)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이 벌어졌으나 농민군이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초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곰티·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하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농민군을 배치하여 공주를 협공하기로 정하였다. 11월 8일 총공격을 시작하여 정부군을 우금치로 몰자 조선, 일본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좌, 우측에서 협공으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공주의 남동쪽으로 후퇴하면서도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결국 제2차 공주접전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였다. 전봉준은 계속된 조선, 일본 연합군의 협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였고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며 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관련역사/동학군_우금치_전투_패배.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3/10/10 02:54 저자 u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