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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역사:조선_국호_대한제국으로_변경

대한제국 선포

[ 大韓帝國 ]


환구단과 황궁우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

대한제국기는 전통적 질서와 가치관이 잔존하는 가운데 새로운 근대사회를 향한 움직임이 본격화한 과도기이다. 을미사변 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1년 정도 머물다가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는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미 ‘제국’을 칭하였듯이, 대한제국도 근대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활동하려는 의지를 황제국 선포로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농상공부 협판 권재형, 외부 협판 유기환, 전 군수 정교 등의 칭제(稱帝) 논리는 대부분 자주독립 국가에서 스스로 존호(尊號)할 수 있고, 존호를 통해 국가의 위신을 높여 자강(自强)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럽 제국과 평등한 외교를 펼치는 데는 동양사회에서만 통하는 ‘제(帝)’와 ‘왕(王)’의 구별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주장, 만국공법에 의하면 자주국은 스스로 존호할 수 있고 타국이 그것을 승인할 권리는 없다는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도 등장하였다.

김재현 등 716명의 연명 상소에서는 우리나라가 삼한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가 4,000리이고 인구도 2000만에 달하니 큰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의정부 의정 심순택과 궁내부(宮內府) 특진관 조병세 등 백관의 연명 상소, 지방의 유학(幼學), 성균관 유생, 시전 상인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최익현, 유인석 등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들의 반대를 제외하면, 칭제를 통해 ‘자주’와 ‘자강’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가 대한제국 출범의 배경이 되었다.

황제국 선포에 앞서 8월 14일, 새 연호가 ‘광무(光武)’로 제정되었고, 8월 16일부터 사용되었다. 10월 11일에는 새 국호가 ‘대한(大韓)’으로 결정되었다. ‘대한’이라는 국호가 선택된 이유로 고종은 삼한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것,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미 ‘한(韓)’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들었고, 의정 심순택은 ‘조선’은 옛날에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받은 국호이므로 당당한 황제국이 그 호칭을 계승함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에 대한 오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 독립,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의 지향이 새 국호에 담긴 뜻이라고 볼 수 있다.

10월 12일 새벽, 옛 남별궁 터, 즉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자리에 쌓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10월 13일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출범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대체로 주권 국가로서 실제적인 자주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승인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즉위식 전날 오후 제사 준비를 위하여 환구단에 행차하는 황제 일행의 모습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와 같이, 태극 국기를 앞세우고 황룡포에 면류관을 쓴 황제와 그를 따르는 황태자, 관료, 군인들의 행렬을 보면서 집집마다 태극기를 높이 걸고 색등불을 환하게 달아 놓은 거리의 표정은 오래만에 새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는 밝은 분위기였다. 대한제국기에 태극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공식 표상으로서 관청은 물론이고 민가에서도 국경일이나 행사 때마다 게양하여 충군애국주의의 상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관련역사/조선_국호_대한제국으로_변경.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3/10/10 02:56 저자 user